<중세 3>

*남북조 분열의 시대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가인 호조씨는 천황가에도 점차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천황가는 지묘인과 다이카쿠지의 두 계통으로 분열하여 대립하고 있었는데, 가마쿠라 막부는 천황가의 내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두 계통이 교대로 천황에 취임하는 ‘양통질립兩統迭立’을 만들었다. 

- >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막부를 타도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오키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 > 당시 호조씨에 의해 소외된 무사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를 틈타 고다이고 천황이 다시 거병하여 전국 각지에서 무사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 > 가마쿠라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교토로 급파하여 상황을 모면하려 했으나 다카우지는 막부를 배신하고 교토 로쿠하라를 공격했다. 

- > 관동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결국 호조 다카토키 일족이 자살함으로써 가마쿠라 막부 멸망했다.

- > [겐무신정] : 교토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은 기존의 막부와 섭관, 관백, 원정 정치를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 형태인 공가와 무가가 함께 협력하는 ‘공무협조’ 정책을 도모했는데, 이를 겐무신정이라고 한다. 겐무는 고다이고 천황의 연호이며, 신정은 개혁을 뜻한다. 그러나 겐무신정은 2년만에 무너지고 만다. 

- >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페위되고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도망가게 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에서 자신이 정통 천황임을 주장하며 조정을 세우게 되고, 그리하여 교토의 북조, 요시노의 남조가 동시에 성립하여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점차 천황을 따르던 무사들이 사망하고 고다이고 천황도 1339년 사망함에 따라, 남조의 세력이 점차 위축되어갔다. 북조도 마찬가지로 내부의 분열과 항쟁으로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8년 북조로부터 쇼군에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고,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정무를 분담하여 통치하였다. 다카우지는 주로 무사들의 은상과 그들의 인사권을 다다요시는 영지 재판을 비롯한 정무, 행정 일반을 관장하였다. 

- >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1350년 다다요시가 반기를 들어 ‘간노의 요란(간노노조란)’이 발생하였다. 

- > 1351년 다카우지는 남조에 항복하여 세력을 만회한 후, 다다요시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다다요시의 사망 이후 여러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 > 이러한 분열을 종식시킨 것은 다카우지의 손자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였다. 요시미쓰는 1368년 쇼군으로 임명된 후 남북으로 나뉘어있던 조정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1392년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양도하여 약 60년 동안의 남북조 내란은 막을 내리고,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적인 통일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북조를 통일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쇼군의 권위를 높이고 전제적인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 막부의 정치 기구를 정비하였다. 또한 유력 다이묘들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쇼군의 권력을 향상시켜 강력한 쇼군 권력을 갖게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으로부터 일본 국왕에 책봉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과 명 사이에 감합무역이 개시되었다. 또한 그는 기타야마 문화를 표상하는 금각사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슈고 다이묘의 성장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의 무사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각국에 슈고를 파견했다. 파견된 대부분의 슈고는 아시카가 일족이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슈고는 관할 지역의 경찰권을 행사했지만,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슈고는 자기 관할 아래에 있는 지토와 고케닌과 사적 주종관계를 맺어 자신의 부하로 편입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슈고는 영지 분쟁이 일어났을 때 농작물을 강탈하는 행위를 단속할 수 있는 권한과 재판의 판결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특히 135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도입한 반제령半濟令은 슈고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제령’이란 본래 장원영주에게 납부해야 할 연공 중에서 군량미라는 명목으로 그 절반을 슈고에게 주고 슈고가 이를 다시 지방 무사에게 분급하는 제도이다. 그리하여 슈고는 점차 성장하여 점차 영국領國을 지배해 나갔다. 그 결과 슈고는 장원과 공령을 자기 영지로 편입시키고, 지방 무사들을 가신으로 삼아 각각의 구니를 지배하는 슈고다이묘(守護大名)가 되었다. 그리하여 슈고들의 권한이 강화되자, 장원과 공령의 연공 징수를 슈고들이 떠맡는 이른바 슈고우케(守護請)가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막부는 지방에서 슈고 다이묘의 영향력을 더 이상 커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들을 교토에 거주시키고, 슈고 다이묘들은 ‘슈고 다이’를 임명하여 자신의 정무를 위임했다. 이후 슈고 다이묘들의 영국은 세습되었고, 막부도 쉽사리 슈고를 파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슈고 다이묘들의 체제를 ‘슈고영국제’라고 한다. 


*감합무역과 동아시아

왜구 : 쓰시마, 이키, 마쓰라를 근거지로 삼은 해적 집단으로, 한반도와 중국의 연안 지역을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  전기 왜구 : 전국이 남북조로 분열하여 중앙권력이 약화되었을 때 등장한 왜구를 통칭한다. 

-  후기 왜구 : 16세기에 출현한 왜구로써, 후기 왜구에는 일본인 이외에도 중국인을 포함한 다국적 사람들이 포함되어있던 것으로 보인다. 

감합 무역 : 명나라가 건국 된 이래 왜구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던 명은 일본 중앙정부를 통해 왜구를 단속하고자 하였다. 요시미쓰는 이에 응하여 명에게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을 받고 명의 연호를 사용하여 명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요시미쓰는 이를 통해 대외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감합’이라는 증표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대명무역을 통상 ‘감합무역’이라고 한다. 감합무역은 1404년부터 1410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에 의해 감합무역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6대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시기에 다시 재개되었다. 일본의 조공 사절단은 명의 영파에서 검사 절차를 거쳐 북경에서 교역했다. 

‘영파의 난’ : 15세기 후반 막부가 쇠퇴하고 상인들이 무역활동을 활발히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오우치씨- 하카타 상인과 호소카씨- 사카이 상인이 무역을 독점했다. 오우치씨와 호소카씨는 대명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영파의 난’이 발생하였다. 결국 오우치씨가 대명무역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오우치씨가 멸망하면서 감합무역도 중단되고 말았다. 


*막부의 쇠퇴와 오닌의 난

무로마치 시기의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쇼군의 권한을 강화하고 쇼군의 전제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 슈고 다이묘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요시노리는 슈고다이묘 아카마쓰의 저택에서 암살을 당한다. 

- > 그 후 어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쇼군의 지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막부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전국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닌의 난’ : 오닌의 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쇼군가의 후계자 계승 싸움에 있었다. 요시마사는 자신의 후계자로 동생인 요시미를 정했지만, 이듬해 도미코가 요시히사를 낳자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인 요시히사를 차기 쇼군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요시미, 가쓰모토 파>와 <요시히사, 모치토요 파> 사이에 격렬한 권력 투쟁이 발생하였다.

오닌의 난으로 교토는 황폐화 되었고, 전란은 점차 지방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결론이 나지 않고 유야무야 끝나게 되었다. 

결과 : 오닌의 난으로 막부와 쇼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지배력 역시 약화되었다. 전국에서는 슈고 다이묘들이 몰락하고 점차 하극상의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고, 새로운 세력인 센코쿠 다이묘(전국 다이묘)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중세 4>

일본사 스터디

201810002 김기연

1. 서민의 대두와 잇키의 시대

- 가마쿠라 후기부터 기나이 인근 지역에 점차 집락이 형성됨, 장원 내부에 무라(村)발생

-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영주의 부당한 요구에 대항하기 위해, 자위의 필요에서 지역적으로 단결해 공동 자치 조직인 소(惣), 소손(惣村)이 만들어짐

- 영주(슈고다이묘) 마을 통괄 편리, 백성이 직접 연공을 영주에게 납부>소가 책임지고 납부

- 백성들의 지역 결합과 연대의식 강화 > 소손: 영주 압력에 대항, 연공의 감면·불법을 저지른 장원 관리자 파면 요구 > 잇키 결성

- 잇키(一揆): 규揆(법규)를 하나로 함, 마음을 합해 행동함

- 쓰치 잇키: 

1428년 발생, 결속체 잇키가 농민봉기로 발전, 토호·운송업자도 참가, 덕정령(재무파기, 매각한 토지 반환)요구

원인- 농촌의 궁핍(대기근, 화폐경제의 발달)

- 전국시대: 지방의 유력 재지 연주들이 권익을 지키기 위해 잇키 결성함

- 종교 잇키: 법화 잇키(法華一揆)·잇코 잇키(一向一揆)

법화 잇키) 법화종, 교토 상업업자와 도시 주민 주축, 다른 종교에 적대적(잇코 잇키, 엔랴쿠지와 대립)

잇코 잇키) 잇코종(정토진종의 별칭), 혼간지파- 소손결성, 재지영주 지배 반항, 재지영주도 종교에 귀의, 슈고다이묘에 대항

- 가가국: 오다노부나가에게 재압될 때 까지 1세기에 걸쳐 ‘백성이 지배하는 나라(百城特國)’ 

2. 전국 다이묘의 지배 체계

- 오닌의 난 이후로 쇼군&막부 권위 실추, 전국 다이묘(센고쿠 다이묘) 성장

- 전국다이묘 성장

3. 슈고 다이묘에서 전국 다이묘로(다케다 신겐, 다케다씨)

2. 하극상이라는 사회 풍조 이용(오다노부나가, 오다씨)

3. 재지영주 성장(모리 모토나리, 모리씨)

4. 외지인이 외부세력 제압(사이토 도산 ,사이토씨)

- 군사적 핵심: 지역결합(재지영주+백성)

- 집단 전투: 총&창, 군량미&무기 운송에 백성 동원

- 연공 수취체제 정비: 목적- 군사력 유지, 영국 지배, 방식- 가신이 보유한 토지에 따라 세금부과, 의의- 과역을 통일적으로 부과

- 성문법 제정: 목적- 영국 원활한 지배, 배경- 다이묘가 통일적인 광역 지배체제 수립, 방식- 분국법(分國法), 전국가법(戰國家法)

- 농업생산력 향상&발전 목표: 신전개발, 대규모 치수공사, 농업인구 확보

- 무기와 군수품 조달 과정에서 화폐&금은의 수요 증가

- 광산개발: 하이후키 법(제련법)

4. 무로마치&전국 시대 경제

- 농업: 용골차, 시비법, 이앙법, 3모작

- 상공업: 지역적 특색을 살린 특산품 등장, 총의 확산- 제조 공방 발전, 비단, 월 6회 정기시, 전문시장, 행상(시장의 지역적 제한 보완), 좌(座)의 발전- 특권적 동업 조직, 유럽 길드와 유사함, 천황가·사원·신사 보호 아래 세금 면제, 광범위한 독점적 판매권 인정받음, 15세기 이후 신흥 상인 출현(좌에 속하지 않은 상인)

- 화폐유통 활발: 농민- 연공, 잡세, 부역을 화폐로 납부, 영락통보를 비롯한 중국 화폐 대량 수입, 통화로 삼음 > 전국시대- 조악한 사주전 유통, 다이묘: 양질의 동전(세이센,淸錢) 조악한 동전(아쿠센,惡錢)의 교환 비율 규정

5. 도시와 교통

- 상품수송: 수운(水運), 회선(廻船): 200~300石

- 숙박업&운송업: 도이야(問屋)

- 교토로 통하는 운송로에서는 육상 운송업자 바샤쿠(馬借), 사샤쿠(車借) 활약

- 중요 가도(街道) 정비, 각 지역의 다이묘가 영국 내 주요 간선도로 정비, 다이묘는 군사적&경제적 목적 달성 위해 중요 도시, 항만 직할 지배, 불필요한 관소 철폐, 교통운송망 정비 및 통제

- 전국시대: 농촌 수공업&상품경제 발달 > 중세도시 비약적 증가

- 조카마치: 다이묘- 영국 중심지에 큰 성 쌓고 가신들과 모여 살게하는 정책 실시하면서 발생,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신사와 사원 주변으로 소도시 형성

- 항구도시 미나토마치(港町)발달

- 사카이, 효고, 하카타: 외국 무역의 중요 거점

- 도시 상공업자 조(町)공동체 형성, 자치도시처럼 발전하지 못하고 다이묘 지배체제에 편입

6. 무로마치 문화

- 남북조 문화, 기타야마문화, 히가시야마 문화

- 특징:

7. 무가문화, 귀족문화, 대륙의 선종문화, 일본 전통문화 융합

8. 지방까지 문화 전파(오닌의 난 이후)

9. 문화의 서민적인 경향

- 기타야마 문화: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발생한 문화, 금각·교·노겐이 대표적

- 히가시야마 문화: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에 의해 발생한 문화, 은각(가레산스이)·다도·수묵화(가노파, 야마토에 수법)가 대표적






<근세 1>

일본 근세역사의 서막


201810034 차준호


Ⅰ. 유럽의 일본 진출과 기독교 전파


<개괄>

-  15C 후반~16C 유럽은 유럽과 아시아를 직접 잇는 새로운 신항로를 개척, 무역의 확대·기독교의 포교·식민지의 획득을 도모

 유럽- 아시아를 잇는 지중해와 비단길 루트를 이슬람 세력이 막고 있었기 때문

-  1543년 중국 닝보(寧波)로 가던 중국 선박이 규슈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것을 계기로 포르투갈·일

본간 무역이 시작됨.

 이들 포르투갈인으로 대표되는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 남단인 다네가시마로 들어왔기 때문에, 당시 일본인들은 이들을 남쪽의 오랑캐, 즉 남만인(南蠻人)으로 불렀으며, 이들을 통해 들어온 문화를 남만문화(南蠻文化)라고 함.

-  ‘조총’이라 불리는 화승총과 더불어 화약, 중국산 생사, 견직물, 설탕, 약품 등이 일본으로 들어옴.

 특히 화승총은 사카이, 네고로 등지에서 대량생산되어 일본의 전술(戰術)이 기마 중심 전법에서 보병 중심 전법으로 바뀌는 전술혁명이 발생.

 화승총은 무게가 가볍고 고강도의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손쉽게 조작이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다이묘들이 이러한 강점을 살려, 화승종을 소지한 부대, 즉 철포대(鐵砲隊)를 조직.


1) 그리스도교

-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옴과 동시에 선교사들도 함께 들어옴.

 상인들은 무역의 조건으로 그리스도교 포교를 요구. 조총등을 포함한 남만문화를 받아들여 경쟁력 강화를 도모했던 다이묘들은 이를 수락, 협조함.

 유럽의 일본 무역은 기독교 선교활동과 일체를 이루게 됨.

 대표적인 선교사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루이스 프로이스, 가스파르 빌렐라

 다이묘들의 보호하에 선교활동이 이뤄지면서 당시 규슈에만 12만명, 기나이지역에만 2만 5천명의 기독교신자가 존재했음.

-  전국시대의 유력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도 그리스도교 포교를 허용 및 선교사 보호

10. 조총 등의 남만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함

11.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불교세력을 견제하기 위함

 But,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 인간중심 사상은 당대 지배세력에게는 꽤나 큰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代 중·말엽에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는 에도시대까지 이어짐.


Ⅱ. 오다 노부나가 정권


1)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전국시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희대의 풍운아

오와리의 슈고다이의 가신 출신으로 하극상으로 자신의 주군과 종가를 몰아내는 하극상으로 전국 다이묘(戰國大名)이 된 인물이다. 오와리 통일 이후 1560년의 오케하지마 전투에서 3천의 병력으로 이마가와 가문의 3만의 군대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국시대의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무로마

치 쇼군家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도와 그를 15대 쇼군으로 옹립(1567)하면서 중앙인 교토에 진출하여 권력을 잡게 된다. 

이후 ‘꼭두각시’로 군림하던 쇼군 요시아키가 권위와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유력 가문과 연합을 하여 반대세력을 구축하게 되고, 그 유력 가문 중 전국시대에서 가장 강성했던 세력 중 하나인 다케다 신겐이 교토 코앞까지 진군하여 노부나가를 일생일대의 위기로 몰아넣는다(1572). 그러나 신겐이 이듬해 부상으로 인해 급사하여 다케다 가문은 회군하였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노부나가는 바로 반대세력을 제거, 요시아키를 폐위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종말을 고한다(1573). 이후 나가시노 전투(1575)·이시야마 전투(1570~80)등을 통해 유력 다이묘·종교세력을 점점 제거해 나가고 1582년 전국통일은 눈앞에 두게 된다. 그러나 유일하게 남은 세력이었던 모리 가문 정벌을 위해 혼노지에 머물고 있던 도중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변을 일으켜 노부나가를 죽이게 된다. 결국 그는 전국 통일의 꿈을 목전에 둔 채 눈을 감게 되었다.


2) 노부나가 정권의 정책

-  노부나가는 중세의 정치·경제·질서·권위를 부정, 새로운 지배 질서를 창출하고자 했음

12. 경제 정책

 당시 최고의 경제 도시이자 자치도시인 사카이(堺)를 지배하에 넣었고, 이를 통해 기나이의 높은 생산력을 자신의 통제하에 집중시킬 수 있었음. 

 검문소 철폐 → 유통을 원활히 함

 상인의 자유로운 왕래와 영업활동 장려

13. 종교 정책

 엔랴쿠지와 잇코 잇키 제압

 종교 논쟁 종결 및 탄압을 통해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줌.

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호의적 태도를 취해, 불교세력 견제 및 선교사 활동 지원 ← 유럽과의 무역에도 큰 관심을 보임

14. 사회 정책

 무사와 상공인의 도시 집주 추진 → 근세적 도시 창출(병농분리&조카마치 건설)

 영주에게 생산량 신고 권고 → 토지의 지배자·경작자·경작 면적·생산량의 정확한 파악

4. 의의 : 중세를 부정하고 근세로 나아간 선구적 정책 


Ⅲ.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1)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오와리의 농민 출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발탁되어 고위 장군으로 출세했다. 노부나가 사후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부나가의 측근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노부나가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이후 노부나가의 최측근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휘하에 두는데 성공했고, 1590년 호조 가문의 멸망을 끝으로 전국시대를 종결시켜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

전국 통일 이후 전국 지배와 조선 침략에 전념했던 그는 조선에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했고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1592년 15만의 군대를 파견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명과의 화해교섭이 결렬되

자 1597년 재차 조선을 침략했으나 일본군은 조선과 명의 반격으로 참패했고, 1598년 그가 사망함으로써 철군하기에 이른다. 이후 히데요시 정권은 전국시대부터 오랜 기간동안 2인자로써 때를 기다리며 세력을 키워갔던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붕괴되었다.


2) 히데요시의 정책

15. 경제 정책

 약 200만석에 달하는 직할령과 주요 금·은광산, 각지 도시와 호상, 도로를 장악 → 경제적 지배 강화

 토지조사 실시 : 전국의 토지를 동일한 자로 직접 측량하여 모든 토지를 4등급으로 분류 → 각각의 토지에 기준 생산량을 곱하여 쌀의 생산고인 고쿠다카(石高)를 정함.

 토지 대장에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이름과 경작 면적을 등재 → 한 토지에 여러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부정, 일지일작인제(一地一作人制)를 확립 & 농민의 개인 토지 소유가 법으로 인정 + 농민이 세금의 부담자로 자리하게 됨.


16. 사회 정책

 고쿠다카를 기준으로 다이묘에게 영지 부여 및 군역 부과

 잇키 봉쇄를 꾀함 → 도검 몰수 = 무기 소유 금지법

 무인(武人)이 상인, 농민이 되는 것을 금지 → 신분사회의 기초 창출 + 병농 분리의 완성


Ⅳ. 아즈치 · 모모야마 문화

-  노부나가/히데요시 代의 문화를 일컬음

 노부나가의 거점 아즈치 성과 히데요시의 거점 모모야마 성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명칭

 부와 권력이 집중된 통일 정권 시기에 발전되었고, 노부나가/히데요시가 이전까지의 문화를 담당하던 사원세력을 약화시켜 불교적인 문화 색채가 약화되었음


1) 특징

17. 개방적 분위기를 반영, 신선미가 넘침 & 거대 권력·부를 반영, 호화롭고 장대함

18. 불교 문화의 색채↓, 현실·현세적 성향이 강했음

19. 유럽 문화의 접촉을 통해 문화가 다채로워짐

20. 학문과 종교보다는 미술공예와 생활 문화 영역에서 변화가 크게 일어남


2) 대표적인 예시

-  성곽 건축 : ex) 오사카 성, 아즈치 성 etc

 이전의 산성형태가 아닌 교통이 편리한 평지에 위치하며 중층의 천수각을 가진 본환과 토루, 해자로 둘러싸여 있음. 

 전국시대의 성처럼 전투적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영국 지배의 거점으로 성격을 지니게 됨

 웅대하고 화려하게 축조되어 천하 통일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드러냄


-  성과 전각 내부를 장식하는 장벽화와 풍속화 발전

 풍속화 :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상인과 서민의 생활, 풍속 등을 소재로 함

 지배새력 뿐만 아니라 서민의 발전이 이뤄졌음을 의미


-  유럽문화(남만문화)

 시계, 안경, 포도주, 화승총, 오르골, 오르간, 비올라 등 문물이 들어옴

 담배 풍습

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의 학문과 항해술, 서양화의 기법이 전해짐

 서양식 활자인쇄술이 도입

 임진왜란 이후 포로로 잡아온 도공들에 의해 도기가 생산되고 발전하게 됨.



Ⅳ. 에도막부의 성립과 막부·번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2 인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지배권을 확립해 나갔다. 이에 히데요시 정권의 실무 관료이자 ‘브레인’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지배권 확대에 불만을 품고 오오미의 세력과 임진왜란의 ‘실패세력’을 끌어들여 反 이에야스 세력을 구축했다(서군).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오와리의 전국시대 주역들과 임진왜란의 ‘영광파’를 주력으로 하여 미쓰나리의 서군과 맞서게 된다(동군). 이들은 각각 10만과 8만의 병력으로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전투(세키가하라 전투)를 치르게 되고 8시간만에 동군의 대승으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3년뒤인 1603년 쇼군이 되어 ‘에도막부’를 개창한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히데요시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기 위해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시의 후계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까지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오사카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를 제거함으로써 완전한 패권을 확립하게 된다.


1) 오사카 전투 직후 이에야스의 업적

21.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

 다이묘가 거주하는 본성을 제외한 모든 지성을 파괴

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다이묘들의 군사적 거점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각지의 성을 거점으로 다이묘에게 저항하려는 무사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있었음

22. 무가제법도

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함 → 막부&다이묘 간의 사적 주종관계가 공적인 정치관계化


23. 공가제법도&금중병공가제법도

 공가 및 조정 통제의 기준 마련 & 일본 근세 국가의 기본법


4. 사원과 신사의 통제 강화


2) 막부와 번

-  에도 막부의 2대 쇼군은 다이묘·공가·사원·신사에 영지 지배를 확인하는 문서를 발행하여 전국 토지의 영유자임을 나타냄.

-  이어 막부가 유력 다이묘 및 최측근 다이묘들까지 처분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천하에 드러냄

-  2대 쇼군 이후에도 막부는 다이묘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다이묘들을 재배치하여 권력을 강화했음

 다이묘들이 한 곳이 거주하여 그 세력을 키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재배치하여 영지를 다르게 했다는 것

-  막부 권력의 중심지인 관동지역과 전국의 군사·교통의 요지에는 도쿠가와 일가를 집중 배치하고 도자마다이묘들은 변경에 배치해 막부의 안정을 도모했음

-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거주시킴으로써(인질) 다이묘에게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게 하는 ‘참근교대제’를 제도화

 이는 다이묘에게 막대한 재정을 소모케 하여 다이묘의 세력이 약화되는데 결정적인 역할.

 이어 에도와 오사카 등 참근 행렬이 지나는 가도와 숙역이 번영되었고 도로가 발전.